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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일보 2010년 소설

시작점,0

정보고

시작점,0 - 정보고

여자의 등 뒤로 달칵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닫힌 문에 등을 가만히 기댄 채 섰다. 문 앞을 밝혀주던 불빛이 스르르 꺼졌다. 물체를 인식하면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인공센서 전등이다. 전등은 인식했던 물체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여자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전등은 화들짝 놀란 듯이 다시 불빛을 내뿜었다.

여자는 아파트 1층 출입문 입구에 서서 잠시 망설였다. 일부러 쏟아 붓는 것처럼 내리는 굵은 빗발이 여자를 가로막고 있었다. ‘루사’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태풍이 몰고 온 어기찬 빗줄기였다. 태풍은 남부지방의 비닐하우스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산을 무너뜨려 인가를 덮쳤다. 태풍의 이름이 여성인 것은 사나운 태풍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여자는 ‘루사’가 상처받은 여자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두 잔의 커피 때문이었을까. 여자가 쉽게 잠들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아파트 숲을 빠져나가지 못한 바람이 우- 짐승의 소리를 냈다. 길을 잘못 든 바람이 지그재그로 늘어선 아파트 숲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싱크대 서랍에서 약통을 꺼내 알 약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물을 머금고 알약을 입에 넣으려다말고 여자는 알약을 다시 통에 넣었다. 꿀꺽 여자가 물을 삼켰다. 슬픔 같은 것이 목젖을 타고 가슴 한 복판을 지나서 아랫배 깊숙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순간 여자의 아랫배가 팽팽히 당겼다. 여자는 약통을 서랍에 넣었다.

닫힌 방 문 사이로 남편이 코고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여자가 안방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가 외출복과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옷을 갈아입는 여자의 손이 퍼붓는 비 때문에 잠시 멈칫했다. 여자는 이내 옷을 입고 핸드폰과 키를 챙겨서 현관문을 나섰다.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은 것을 잠깐 후회하다가 여자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여자가 전용으로 차를 세워두다시피 하는 장소에 여자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세웠더라……. 여자는 차를 주차한 곳이 생각나지 않아서 빗속에 망연히 서 버렸다. 양 미간을 좁히며 마지막으로 차를 탔던 시간을 되짚으려 애를 썼다. 요즘엔 하루 전의 일도 까마득하게 여겨졌다. 오늘과 어제의 거리가 까마득한 유년의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여자는 주차장의 차들을 눈으로 훑어보며 걷다가 어느 순간 아, 하는 탄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 섰다. 여자의 차는 그 곳에 있지 않았다.

“8주쨉니다.”

50대 초반의 원장이 차트를 뒤적거리며 여자에게 말했다. ‘여자의 나이 서른아홉, 출산 경험 1회’라는 차트기록을 들여다보며 원장은 여자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지워 주세요. 엊저녁부터 굶었어요.”

또 한 장, 삶의 갈피를 넘기면서 여자는 흔적을 지우고자 했다.

원장은 안경 너머로 잠시 여자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럼 우선 수술실로 올라가 계세요.”

원장은 옆에 서 있던 간호사에게 수술준비를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여자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간호사가 손바닥 만 한 수액주머니를 가져와 베드 머리맡에 있는 T자형 폴대에 걸었다.

투명하게 떨어지는 수액을 보면서 여자는 얼마 전에 했던 ‘오라소마 테스트’를 떠올렸다.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색깔입니다. 개량한복을 입은 오라소마 프랙티셔너는 여자가 고른 병을 가르키며 말했다. 당신이 선택한 바틀은 눈물을 뜻하는 겁니다. 바틀 색깔이 투명하지요? 요즈음 눈물이 많아지지 않았나요? 이제 눈물의 시기가 가고 환희의 시기가 올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택한 바틀이 오렌지 색 이잖아요. 단, 당신이 현재를 충실히 살았을 때만이 환희의 시기가 옵니다. 그 때 여자는 많이 운 것 같다. 여자가 여태껏 밖으로 흘려보낸 눈물들이 수액이 되어 다시 여자의 몸을 채우는 것만 같았다.

조금 뒤 원장이 수술 가운을 입고 여자가 누워 있는 베드 옆에 섰다.

“마취주사예요, 자 숨을 크게 들이마셔요.”

여자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였다. 여자의 아랫배가 팽팽히 당겨왔다. 여자가가 베드로부터 튕겨지듯이 일어났다.

“잠깐만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무래도 지금은 안 될 것 같아요.”

주사기를 들고 움찔 뒤로 물러서던 원장이 잔뜩 인상을 썼다. 원장이 수술실에서 나가자 간호사가 여자의 손에서 주사바늘을 빼내고 걸려있던 수액 주머니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들며 말했다.

“아줌마, 수술이 애들 장난인줄 아세요?”

병원의 지하주차장을 빠져나온 여자는 시 외곽을 향해 차를 몰았다. 종일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의 지열로 인해 열린 차창 안으로 더운 바람이 들어왔다. 일부러 에어컨을 켜지 않은 채 여자는 더위를 견뎠다. 여자는 카 오디오에 CD를 넣고 볼륨을 한껏 높였다.

잔광이 남아있는 하늘빛이 쓸쓸했다. 이렇게 해가 지는 저녁 무렵이면 여자는 동생과 함께 토방에 걸터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일곱 살이 되도록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여동생은 빠- 빠- 하면서 두 손으로 배를 문질렀다. 배가 고프다는 표시였다. 함부로 쏟아져버린 붉은 빛들이 어둠에 지워질 때쯤이면 엄마는 급하게 대문이 밀고 들어왔다.

“아이고 어쩌끄나 내 새끼들”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와 여자와 동생을 품에 안는 어머니의 몸에서 진한 박하분 냄새가 났다.

어느 날, 어둠이 마당을 넘어서 툇마루까지 올라와도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가 칭얼거리는 여동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여동생이 벽에 걸린 어머니의 월남치마 자락을 붙잡고 울먹거리다가 기어코 큰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다. 여동생의 울음소리에 컹컹 어둠이 울렸다. 여자가 동생을 안았다. 동생이 울다가 지쳐서 여자의 무릎에서 잠이 들었다. 여자는 어머니가 금방이라도 대문을 밀고 들어올 것 같아 온 신경을 마당 너머에 기울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는 동생의 손을 잡고 서당골 큰집으로 갔다.

어둠이 하늘과 산의 경계를 지워서 시커먼 하나의 덩어리가 될 때까지 여자는 무작정 차를 몰다가 U턴을 했다. 시에 인접한 지역으로부터 퇴근해서 들어오는 차량들 때문에 도로는 정체가 심했다.

여자가 사는 아파트촌으로 건너가기 위한 교량은 정체가 더욱 심했다. 교량 아래 천변에는 저녁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여자의 집에서 산책하기 맞춤한 거리인지라 여자가 종종 산책을 나오는 곳이었다. 여자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직진차선에서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지만 신호가 떨어지자 좌측 깜빡이를 켜서 무리하게 좌회전을 했다.

여자의 차가 하상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물길을 따라 우레탄을 깐 산책로에 들어선 여자는 즐겨 걸었던 하천의 상류를 향했다. 걷기를 좋아하는 여자는 매번 산책을 할 때마다 홀린 듯이 한없이 걷곤 했다.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돌아가야 하는 까마득한 거리 때문에 여자는 참담한 심정이 되곤 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하천 양쪽의 6차선 도로는 마지막 교각이 있는 지점에서 끝나고 하천 양옆으로 둑길이 이어졌다. ‘시작점 0’이라는 흰 글씨가 둑길에 버티고 선 가로등 불빛에 희미하게 비쳤다. 우레탄 길도 끝이었다.

‘0’ 너머의 길은 잡풀과 갈대밭 사이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번화한 하천의 하류를 향해 산책을 하기 때문에 하천의 상류 쪽인 출발점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여자는 그만 돌아갈까 하다가 갈대밭 사이 길로 접어들었다. 그때였다. 천 건너편 갈대숲으로부터 굵은 톤의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울부짖는 것 같기도 하고 발성연습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가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들어도 발성연습은 아니었다. 고통에 찬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무성한 갈대숲에 몸을 숨기고 울부짖는 남자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저렇게 울부짖고 싶은 시간들이 있을 것이었다. 여자는 남편을 떠올렸다. 좀처럼 감정을 내색하지 않는 남편도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저렇게 울다가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날도 남편은 10시가 넘어서야 약국의 셔터를 내리고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목에 채워진 와이셔츠의 맨 윗 단추를 열면서 남편은 고개를 두 세 차례 흔들었다. 무엇으로부터 겨우 놓여난 것 같은 몸짓이었다. 남편은 둥근 올가미 같은 넥타이를 머리 위로 벗어 던졌다. 남편은 자신이 벗어던진 넥타이에 스스로 목을 맬 수도 있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자신의 존재가 남편이 아침마다 지겨워하면서도 목까지 채워 올린 와이셔츠의 맨 위 단추, ‘조이는 게 싫어’ 하면서도 매일 아침 목에 매던 넥타이 같은 존재인 것만 같았다.

여자가 남편의 옷을 옷장에 걸고 있는데 남편이 침대에 풀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상가 건물 말이야. 아무래도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애.”

여자가 사는 아파트로부터 두 블록 떨어진 사거리에 시공사의 부도로 인해 흉측한 철골만으로 6개월이 넘게 방치된 건물이 있었다. 분양받은 상가는 그 건물 1층 가운데 노른자위였다. 7년 전 화재가 있고난 이후부터 남편이 여자를 피해 도피처로 삼은 약국에서 밤낮으로 일을 해 번 돈으로 분양받은 상가였다.

“원금은 못 받아도 인수한 회사에서 최소한의 보상은 해주지 않을까?”

여자가 남편을 돌아보며 말했다.

“최· 소· 한? 아침부터 오밤중까지 약국에 쳐 박혀서 바카스 한 병 팔려고 오다가다 들리는 동네사람들 시덥잖은 말장단 맞춰주는 일이 얼마나 피곤한 지 당신은 모르지. 그래, 뭘 알겠어. 당신은 힘들면 정신줄 놓고 병원에 가면 되지. 살려고 발버둥치는 내 꼴만 우스운 거야.”

여자는 분노로 인해 두 볼을 부르르 떠는 남편의 모습을 처음 봤었다. 여자는 남편이 더 힘껏 자기를 물어뜯어 놓기를 바랐다. 갈기갈기 찢어 준다면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한 번도 꺼내지 못했던 그날 밤의 화재(火災), 잃어버린 아이를 칼날삼아 여자를 난도질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남편은 거기까지였다.

갈대밭의 남자는 밤새도록 울부짖을 것 같았다. 집으로 걸어갈 때까지 여자의 귓전에서 남자의 울부짖는 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그 날, 습관처럼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던 것을 기억해 냈다. 1시가 넘었는데도 아파트 앞에는 빈 택시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여자는 택시를 타고 하상주차장까지 가자고 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퍼붓는 듯이 비가 내리는데 웬 하상주차장이냐고 머리가 희끗한 기사아저씨가 백미러로 여자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며칠 전 하상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산책을 했는데 깜빡 잊고 그냥 집으로 걸어 왔나 봐요. 평소에 걸어서 산책가곤 했거든요.”

기사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왜 하필이면 이 궂은날 밤늦게 거길 가야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눈치였다. 빗속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차 앞에 여자를 내려준 기사아저씨가 친절하게도 헤드라이트를 켠 채 여자가 차에 오르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하상주차장을 벗어나자 여자는 딱히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도 없이 톨게이트 쪽으로 차를 몰았지만 막상 목적지를 정하려니 갈 곳이 없었다. 여자는 톨게이트에서 통행권을 뽑아들고 오른쪽과 왼쪽 길 사이에서 망설였다. 여자는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고향을 갈 수 있는 길이었다.

자정이 넘은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서 윈도우 브러시가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앞길을 열어주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서두를 건 없었다.

승용차 한 대가 빗속에서 속력을 내며 앞서갔다. 여자는 멀리서나마 앞 선 차의 불빛을 보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승용차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맞은편 차도에도 차량의 통행이 거의 없었다. 여자가 속력을 더욱 늦추며 가는데 산더미 같은 짐을 적재한 화물차 한 대가 여자의 차를 추월했다. 여자는 화물차를 바짝 따라갔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화물차는 여자의 길잡이가 돼주었다.

여자가 일단 쉬어가기로 작정했던 여산 휴게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여자는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고속도로에서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지 않는 이상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화물차가 오른쪽 깜빡이를 켜더니 갓길에 정차를 했다. 비를 이길 수 없었거나 졸음을 이길 수 없었나보다. 여자는 갑자기 달려드는 어둠을 맞닥뜨리며 당황했다. 여자는 속도를 줄였다. 가끔씩 여자의 차를 추월해가는 차의 꽁무니를 따라갔다. 여자가 차의 속력을 내지 못해서인지 앞 선 차를 놓치곤 했다. 앞 차의 꽁무니에 달린 미등이 눈을 부릅뜬 짐승처럼 여자를 노려보기도 했다. 여자는 포기하지 않고 따라갔다. 차는 속력을 내더니 어느새 여자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결국 여자는 어두운 밤길을 혼자서 갈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정숙이 아부지 싸우디 간지가 일 년도 안 되얏는디 그 새 서방질에 눈멀어서 보따리를 싸불었담서?”

“그 인물이 보통 인물이요. 노가다판에서 손탈까봐 일부러 정숙이 아부지 혼자 현장으로 떠돌다가 장사 밑천이나 모아서 마누라랑 살 것다고 싸우디로 갔다는디.”

대문 밖에서 기웃거리던 아줌마들이 여자를 향해 쯧쯧 혀를 차며 수군거렸다.

“뭔 굿판 벌어졌다요? 다 가씨요 가.”

큰아버지가 대문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메, 저 성질머리 허고는.”

여자들이 멈칫 물러섰다.

“저 집안도 말쪼여. 저 사람은 월남 갔다가 고엽젠가 뭔가 땜에 고자가 되야 불었담서?”

여자들이 돌아서며 속닥거렸다.

“저 사람이 고잔지는 어떻게 알어? 집이가 봤어?”

“꼭 봐야 알간. 정 다방 미쓰 김이 그러대. 그 짓도 제대로 못 허믄서 만날 추근댄다고.”

여자들이 킥킥거리며 멀어져갔다. 여자가 동생의 손을 잡고 큰집을 향하는 리어카 뒤를 따르는데 텅 빈 들판으로부터 매운바람이 불어왔다. 여자가 아홉 살 때 일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동생은 마당에서 사방치기를 하며 여자와 놀다가도 대청 마루에 걸린 괘종시계가 다섯 번을 치면 후다닥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TV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쯔케 저 시계소리는 귀신 같이 알아듣는지 몰러.”

커다란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안방으로 뛰어가는 동생을 보면서 큰어머니는 웃곤 했다. 저녁밥상을 물리고도 동생은 TV 앞을 떠날 줄 몰랐다. 9시 저녁 뉴스를 하는 시간이 동생이 자는 시간이었다. 동생은 TV 앞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옆에 앉아 있는 큰어머니나 큰아버지 무릎위로 커다란 엉덩이를 쑤욱 들이밀며 품으로 파고들곤 했다.

“워메, 등치는 말 만헌 것이 어디로 파고든다냐.”

어머니는 슬그머니 동생을 밀어냈다. 잠이 오면 어머니 품을 파고들던 버릇 때문이었다. 큰아버지는 차마 동생을 밀어내지 못하고 ‘허 참’ 하면서 어색하게 동생을 안았다.

“참말로 별일이구만. 동네 애기들은 당신만 보믄 다 도망가는디 정민이는 그래도 핏줄이다고 고로케 앵기는 갑소.”

큰어머니는 동생을 신통해했다. 언제부터인가 큰아버지가 먼저 동생을 불러 무릎에 앉혔다.

“워메, 우리 정민이 궁둥이 실팍한 것 좀 보소. 지금 시집보내도 되겄네.”

가끔 큰아버지가 동생의 엉덩이를 두드리며 놀려대곤 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큰어머니가 순영이네 집에 마실 나간 밤이었다. 그날도 정민이는 큰 아버지의 무릎위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9시 뉴스가 시작되자 여자는 건넌방에 가기 위해 여동생을 부르다가 큰아버지가 동생의 사타구니 사이에 얹었던 손을 재빨리 무릎 쪽으로 치우는 것을 보았다. 큰아버지는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동생을 안아서 건너 방으로 옮겨 뉘였다.

다음날 여자는 잠에서 깬 동생에게 일부러 험악한 얼굴로 종주먹을 들이대며 말했다.

“너, 큰아버지 무릎에 앉으면 죽을 줄 알아.”

그러나 동생은 여전히 큰 아버지 무릎위에 앉았다. 여자는 동화책을 읽어주겠다며 동생이 잠들기 전에 억지로 끌어내 건넌방으로 데려오곤 했다. 잠투정 하는 동생을 달래기 위해 여자는 얄팍한 무릎을 동생에게 내주었다. 동생은 퉁실하게 살찐 몸을 여자에게 맡겼다.

여자는 어머니가 동생을 재우면서 부르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엄마가 섬 그늘에 김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여자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동생의 눈이 스르르 감기면 여자는 노래를 멈추고 습관처럼 마당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삐그덕, 대문이 열리고 금방이라도 어머니가 달려올 것만 같아서였다.

겨울방학이 되었다. 순영이 할머니 회갑잔치가 있는 날이라 동네가 온통 잔칫집 같았다. 큰어머니는 일을 거들어야 한다며 순영이네로 갔다. 배부르게 점심을 먹은 아이들은 볕이 잘 드는 큰 집 담벼락 아래에서 모여 놀다가 누군가의 제안으로 숨바꼭질을 하기로 했다. 여자는 여기 저기 숨을 곳을 찾다가 농번기가 끝나서 사람들 출입이 뜸한 큰집 광으로 숨어들었다.

광문을 닫고 들어서자 생각보다 광 안이 더 어두웠다. 여자는 ‘밖으로 나갈까’ 하다가 술래가 열을 다 세어가는 것을 듣고는 부리나케 농기구와 볏가마 사이에 몸을 숨겼다. 조금 후, 삐그덕 거리며 광문이 열리는 것 같더니 이내 닫혔다. 여자는 안도의 숨을 내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간이 지나고 “정숙이 못 찾았어.”하는 순영이 소리가 들렸다. 술래가 여자를 찾는 것을 포기한 것 같았다. 여자가 엉덩이를 털면서 일어나는 순간 다시 광문이 열렸다. 여자는 숨을 죽이고 주저앉았다. 누군가 들어오고 있었다. 여자를 찾는 술래는 아니었다. 어둠에 익은 여자의 눈에 어른과 아이로 짐작되는 사람이 보였다. 어버어버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생이었다. “괜찮아, 걱정 말고 여기 사탕 먹어” 뒤이어 큰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는 온 몸에서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거친 숨소리가 났다.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려고 할 때마다 큰아버지가 헉헉대며 “응 응, 여기 사탕, 사탕 먹어”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이 계속 끙끙대고 있었다. 광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인지 갑자기 아랫배가 뻐근해 지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참으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그렇다고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몸을 비틀면서 오줌을 참았지만 도리 없이 여자의 아랫도리가 따뜻해지며 신발에 물이 고여 왔다.

소리가 이내 잠잠해지고 잠시 후 광문이 열렸다. 큰아버지가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열린 문 사이로 마당에 쏟아지는 햇볕 한 줌이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에야 여자는 냉기가 도는 아랫도리로 인해 온몸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자는 문 밖의 세상이 두려워서 광문을 나설 수가 없었다. 언젠가 엄마를 따라 버스를 탈 때처럼 어질어질하고 속이 메스꺼웠다. 여자의 몸이 땅 속으로 쑥 꺼지는 느낌이 드는 것도 같았다. 여자가 눈을 떴다. 방 안이었다. 동생이 옆에서 자고 있었다. 온 몸이 욱신거리고 목구멍이 따가웠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큰어머니가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이 미련한 인사야, 숨바꼭질 두 번만 허다가는 숨 끊어지것다.” 하며 여자를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순영이네서 늦게 돌아온 큰어머니가 여자를 광에서 발견한 것은 한밤중이었다. 어디에서 놀고 있거니 했는데 밤이 늦도록 여자가 돌아오지 않자 큰엄마는 여자를 찾아 나섰다. 순영이에게 숨바꼭질을 하다가 여자가 없어졌다는 애길 듣고 동네 사람들이 온 동네를 샅샅이 뒤졌다. 큰어머니가 오줌을 싼 채 광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동생은 예전처럼 큰아버지 무릎에 앉지 않았다. 그러나 양갱이나 사탕을 받아먹기 위해 여전히 큰아버지 주변을 맴돌았다.

초여름이었다. 큰아버지가 백설 공주가 그려진 분홍색 슬리퍼 두 켤레를 사서 여자와 동생 앞에 내밀었다. 여자는 슬리퍼를 받고 좋아하는 동생을 데리고 뒤란으로 갔다. 여자가 엉덩이를 까고 두 켤레의 분홍색 슬리퍼에다 오줌을 깔겼다.

“너도 해 봐.”

동생이 여자를 밀치며 악을 쓰고 울더니 제 슬리퍼를 챙겨서 샘가로 가져갔다.

여름방학이었다. 큰아버지가 책을 본답시고 엎드려 있는 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흐벅진 동생의 궁둥이에 큰아버지의 눈길이 머물렀다.

“정민아, 멱 감으러 가자.”

여자가 동생의 손을 잡아끌었다. 동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여자는 동생을 억지로 이끌고 동네 아이들과 함께 강가에 갔다. 동생이 분홍색 슬리퍼를 철퍼덕거리며 마지못해 따라 나섰다. 여동생은 물을 무서워했다. 여자가 허리를 굽혀 다슬기를 건져 올리며 강가에서 돌멩이를 줍고 있는 동생을 보곤 했다. 다슬기가 바구니에 절반쯤 차올랐을 때였다. 어버 어버 하는 동생의 비명이 들림과 동시에 아이들이 강가에 있는 동생을 강 안쪽으로 밀어 넣는 것이 보였다. 강물은 여자의 무릎께에 차올랐다. 동생이 기우뚱 하는가 싶더니 물 속으로 주저앉았다. 허우적거리는 동생의 손이 보였다.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며 동생을 보고 있었다. 여자가 동생을 향해 다가가려는 순간 동생이 벌떡 일어나는가 싶더니 정신없이 냇물을 따라 내려갔다. 동생의 분홍색 슬리퍼가 굼실굼실 떠내려가고 있었다. 여자와 동생의 간격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갑자기 여자의 시야에서 동생이 사라졌다. 여자는 동생을 향해 첨벙거리며 뛰어갔다. “가지 마, 따라 가믄 죽어” 아이들이 외쳤다. 여자는 그 자리에 우뚝 서버렸다. 동생이 몇 차례 물 위로 떠오르는 것 같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남은 슬리퍼 한 짝이 동생이 사라진 물 위에서 맴돌더니 잃어버린 짝을 찾듯이 급하게 떠내려갔다.

동생이 죽은 후, 아버지가 왔다. 한 달여를 쉰 뒤에 여자의 아버지는 저녁밥상을 물린 자리에서 큰아버지 내외에게 말했다. “강원도에 공사 현장이 있다고 오라는디 가봐야것습니다. 지가 노가다판을 따라다녀야 해서 정숙이는 형수님이 좀 거둬 주십시요. 전처럼 달마다 돈은 부치것습니다.”

그날 밤 여자는 아버지를 따라가겠노라고 졸랐지만 소용없었다. 다음날 여자는 아버지를 따라 신작로까지 나가면서 다음에 올 때는 꼭 데려가 달라고 사정을 했다. 아버지는 “알았응께 얼른 들어가. 큰어머니 말씀 잘 듣고 있으믄 아버지가 금방 올꺼여”하며 길을 나섰다. 여자는 아버지의 모습이 산허리를 돌아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길 가운데 버려진 느낌이 들었다

주유등에 불이 켜졌다. 앞으로 20킬로를 더 갈 수가 있었다. 갓길에 세워둔 화물차와 승용차들이 여자의 눈에 자주 띄었다. 인간시대였던가. 카메라는 3가지 직업을 가지고 하루에 3시간을 자면서 일을 한다는 화물차 운전기사의 24시간을 쫓았다. 늦은 밤, 기사의 아내가 나들이 가듯 도시락과 음료수가 든 작은 바구니를 들고 아이를 데리고 화물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아있던 가장이 카메라를 의식하듯 어색하게 “왔어?” 하며 아내를 반기고 아이는 앞좌석 뒤 칸으로 넘어갔다. 담요가 깔린 옹색한 공간은 아이의 키에 맞춤했다. 고생스럽지 않느냐는 리포터의 말에 기사의 아내가 말했다. “혹시나 졸음운전을 하지 않을까 집안에 앉아서 걱정하는 것 보다는 나아요. 애 아빠 눈꺼풀이 내려온다 싶으면 갓길에 차 세우게 하고 한 숨 자기도 해요.” 뒷좌석의 아이가 카메라를 향해 얼굴을 들이밀자 한 가족의 행복한 모습이 화면에 가득 찼다.

여자의 아이가 컸다면 아마 그 보다 서너 살은 위였을 것이었다.

분만촉진제를 맞고도 여자는 하루를 넘겨서 아이를 낳았다. 모진 산고를 잠시 잊고 여자는 웃었던 것 같다. 2.8Kg의 딸 아이였다.

아이의 모습 위에 죽은 동생의 모습이 중첩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3개월 쯤 되었을 때였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눈을 맞추던 여자는 불현듯 자신의 얄팍한 무릎에 몸을 얹고 잠이 들던 동생을 떠올렸다. 몇 차례 물에 떠오르다가 모습을 감춰버렸던 동생의 모습도 떠올랐다. 여자는 아이에게 물렸던 젖꼭지를 빼냈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젖꼭지를 찾던 아이가 바락바락 울어댔다. 그 후로 여자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다. 엄마의 젖꼭지에 길들여진 아이는 우유가 들어있는 고무젖꼭지를 혀로 밀어내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배고픔 때문에 아이는 계속 울어대고 여자는 퉁퉁 불어난 젖을 짜내면서 젖몸살을 앓았다.

“멀쩡한 젖을 짜내면서 왜 애는 굶기는 거야?”

아이가 며칠 동안 밤새 칭얼거리자 잠을 설친 남편은 여자에게 신경질을 내며 잠자리를 작은 방으로 옮겨버렸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있을 때에도 아이의 모습이 동생과 중첩되었다. 동생의 사타구니에서 무릎으로 재빠르게 미끄러지던 손의 환영이 여자를 힘들게 했다.

어느 날, 여자가 남편의 늦은 저녁밥상을 차리고 있을 때 아이가 울자 남편이 아이를 안고 주방으로 왔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안고 있는 남편으로부터 아이를 거칠게 빼냈다.

“아이는 왜 안고 그래?”

“애가 울잖아.”

“운다고 덥석덥석 안아주면 애 버릇만 나빠져.”

여자는 아이를 안고 안방으로 갔다. 아이는 실리콘 젖꼭지와 우유가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최소한의 양으로 배를 채우고는 실리콘 젖꼭지를 혀로 밀어내버렸다. 아이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여자는 안방을 나왔다. 남편은 식사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여자가 식탁을 치운 뒤 씻어놓은 우유병들을 냄비에 넣고 가스 불을 켰다. 언젠가 센 불에 우유병을 소독하며 잠깐 다른 일을 하다가 우유병을 모두 태워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여자는 불을 약하게 줄여놓았다.

“저런 쳐 죽일 놈, 아는 놈이 더 무섭다니까. 저런 놈은 쉽게 죽여서는 안 돼. 길 한 복판에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돌맹이 하나씩 던지라고 해서 서서히 죽여야 돼.”

7살 된 여자아이가 이웃에 사는 중년의 신발가게 남자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암매장 된 사건을 보도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주방에까지 들렸다. 여자는 다짜고짜 TV 앞으로 다가가 전원을 꺼버렸다.

“이딴 걸 뭐 하러 봐.”

“당신 요즘 왜 그래? 애 땜에 힘들어도 그렇지, 툭 하믄 신경질에, 짜증에. 이젠 티비도 맘대로 못 보게 하냐?”

남편이 리모컨을 다시 켰다. ‘어린이 성폭력의 실태’라는 타이틀이 화면 오른쪽 윗부분에 적혀 있었다.

“애 깬단 말야.”

여자는 다시 전원을 껐다. ‘에이씨’ 남편이 리모컨을 소파에 던지며 작은 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여자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요즘 들어 아이를 바라보면 여자는 그저 암울하고 절망적인 심정이 되곤 했다. 여자의 목숨은 이제 아이의 것이었다. 아이가 있는 한 여자는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도 살아내야 했다. 뱀같이 미끄러지는 손으로부터, 달콤한 사탕의 유혹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야만 했다. 잘 해낼 수 있을까. 여자는 불안하고 자신이 없었다. 그 생각을 하면 숨이 여자의 목까지 차올랐다. 여자는 안방에서 외투를 들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여자는 큰 길을 따라 걸었다. 밤잠이라 아이가 금방 깨지는 않을 것이었다. 길을 걸으며 여자는 길게 숨을 마셨다. 여자의 가슴에 바늘 구멍만한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조금은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살해된 아이는 일곱 살 이라고 했다. 일곱 살, 되 뇌이며 여자는 동생을 떠올렸다. 여자의 기억 속에서 큰아버지의 얼굴은 가물가물하다.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만 큰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대신, 뱀처럼 미끄러지던 큰아버지의 손, “응 응, 여기 사탕, 사탕 먹어” 헉헉거리던 큰아버지의 말소리, 물 위에서 떠돌다가 떠내려가던 분홍색 슬리퍼 한 짝이 여자를 평생 따라다녔다. 여자는 큰아버지를 향해 조용히 욕을 지껄였다.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보지 못한 욕을 중얼대면서 여자는 정신없이 길을 걸었다. 한참을 걷다가 여자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가야 할 거리가 까마득했다. 여자는 그만 몸을 돌렸다.

여자가 사는 주공아파트 근처에 다다르자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소방차 몇 대가 줄지어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어디에선가 불이 난 모양이었다. 소방차는 여자가 사는 104동 쪽으로 몰려갔다. 여자는 불현듯 우유병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불을 끄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자가 정신없이 뛰어갔다. 여자의 집이 검은 연기를 뭉실뭉실 토해내고 있었다.

잠옷차림의 남편이 아이를 안고 뛰어나오는 소방관의 뒤를 따라 나왔다.

“불길이 안방에 닿진 않았는데 방문이 열려서 유독가스에 질식한 것 같아요.”

구급대원에게 아이를 넘기면서 소방관이 말했다.

아이는 회생하지 못했다. 산후우울증과 더불어 아이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여자는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미안하다. 혼자만 살아 나와서.” 닫힌 방문 덕분에 유독가스에서 살아난 남편은 가끔씩 발작하는 여자를 붙잡고 자책을 하다가 약국을 도피처로 삼아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다.

여자가 다다른 곳은 정읍 휴게소였다. 도중에 여자는 여산 휴게소를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여자는 주유를 마친 다음 휴게소 구석진 자리에 차를 세우고 의자의 등받이를 눕혔다. 오랫동안 걸어온 사람처럼 다리가 아팠다. 등받이에 몸을 눕히자 이내 잠이 쏟아졌다. 빗줄기는 여전히 굵고 사나웠다.

여자가 눈을 뜬 것은 4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그 사이에 빗줄기가 약해진 것 같았다. 여자는 시동을 걸었다. 고속도로는 여전히 한산했다. 희부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여자가 차의 속력을 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올 즈음에 비는 개이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고향과 연결되는 시의 외곽도로를 운전하고 가면서 이쯤에서 그만 돌아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생각과는 다르게 여자는 강둑과 면한 길로 접어들었다. 강물은 온통 흙탕물이었다. 하천변의 밭들이 침수되고 나무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겼다. 이 강물을 거슬러 가면 여자의 고향동네가 나왔다.

여자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큰집으로부터 나왔다. 고등학교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명절 차례를 지내기 위해 큰집에 몇 번 갔을 뿐, 대학 진학 이후에는 걸음을 끊었다. 여자가 대학을 마치자 현장 생활을 접은 아버지가 서당골로 내려갔지만 여자는 아버지조차 찾지 않았다.

여자가 정신과 치료를 마치고 2년이 지난 후 큰아버지의 부고를 받았다. 풍을 맞고 5년이 넘게 자리보전을 한 끝이었다. 여자는 아버지에게 조의금 봉투를 부탁했다.

“사람이 그러믄 못쓴다. 키워준 은공은 알아야제.”

송수화기 너머에서 아버지가 여자를 나무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처음으로 여자는 고향에 갔다.

산일을 하는 사람들이 새벽부터 서둘렀는데도 땅이 얼어붙어서 일이 더디다며 한걱정을 했다. 초봄의 꽃샘추위 때문에 장지에 따라온 사람들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하늘에 구름까지 낀 날씨여서 더욱 추웠다. 여자는 갑자기 오줌이 마려웠다. 소변보기 좋은 곳을 눈으로 훑었지만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터라 여의치 않았다. 그런대로 참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점심을 먹고서야 하관식이 진행되었다. 식구라고는 큰어머니와 아버지, 여자와 여자의 남편뿐이었다. 흙을 한 삽씩 떠서 큰아버지 관 위에 뿌릴 때였다. 추워서 육개장 국물을 떠먹은 탓인지 여자는 오줌이 마려워서 아랫배가 터질 것 같았다. 불현듯 어두운 광 안의 기억이 떠올랐다. 여자의 귀에 동생이 끙끙대는 소리, 큰아버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여자는 그때처럼 오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가 여자에게 삽자루를 건넸다. 여자가 삽자루를 팽개치고 별안간 상복 치마를 들춘 채 바지를 내렸다. 여자는 관을 향해 오줌을 쌌다. 여자의 아랫배가 텅 비워지며 온 몸이 가벼워졌다. 눈물이 나도록 시원했다. 남편과 큰어머니가 여자의 매무새를 급하게 수습한 뒤 남편이 여자를 데리고 산을 내려갔다.

여자는 고향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다리를 건너자 두 개의 갈림길이 나왔다. 신작로와 둑길이었다. 여자는 둑길로 향해 가다가 차를 멈췄다. 여전히 강물은 흙탕물이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이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갈 것이었다. 여자는 동생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지점을 더듬어 보았다. 여자의 마음에 고여서 떠내려가지 못하던 동생이 거기 있었다. 여자는 동생을 그만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멀리, 낮은 산등성이 아래 겁먹은 짐승처럼 엎드리고 있는 작은 마을에 동이 트고 있었다. 한때 여자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던 곳이었다. 여자는 갑자기 오랜 시간 차를 타고도 느끼지 않았던 멀미를 느꼈다. 긴 여행이었다. 등받이를 젖히고 여자는 몸을 눕혔다. 순간 여자의 아랫배가 팽팽하게 당겨왔다. 여자는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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