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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일보 2024년 소설

하찮은 진심

이준아

우하늘 부장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는 중년의 남자였다.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이라면 또 허둥지둥 떠들다가 실언을 했겠거니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그의 경우엔 상당히 뜸을 들여서 한다는 말이 그 지경이라 더 문제가 컸다.

나는 그를 심층-이라고는 하지만 한참 철 지난 압박 면접을 어설프게 흉내 내려다 참혹하게 실패 한 중소기업의 민낯이라 할 수 있는-면접자리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나와 한 방에 들어간 지원자들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표정에서 여유가 묻어나와 나는 질문이 시작되기도 전에 진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도대체 왜 여기에 지원한 걸까 싶은 스펙들이 면접관의 입을 통해 하나씩 드러났다. 이를테면 '어학연수를 통해 언어 말고도 그 나라의 식문화를 많이 접했다고 되어있는데, 그때 그 경험을 제품개발에 활용한다면?' 같은 식이었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엮을 만큼 특별한 이력이랄게 없어서 질문의 뉘앙스가 이상하게 뒤틀렸다.

"여기 보면 공백 기간에 사진 동아리 활동을 길게 했는데, 그 시간에 다른 역량을 키워볼 수도 있지 않았어요?"

그것은 숫제 질문이라기보단 추궁에 가까웠다. 나로서도 그다지 떳떳할 수가 없었던 이유는 좋게 포장해 동아리 활동이라고 했을 뿐 실상은 썸타던 (혹은 타고 있다고 굳게 믿었던) 여자애한테 홀려서 무보수로 걔 쇼핑몰 사진을 찍어주러 다녔던 시기인지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사진이 좋은 매개체였습니다', 제법 괜찮은 임기응변이었다고 자위하기도 잠시, '우리가 식품회사인데, 자소서 대충 봐도 식품에 대한 인사이트가 전혀 없는데, 지금이라도 보탤 말이 있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는 드디어 망했구나 싶었다. 그때 끼어든 사람이 우부장이었다.

"어, 음, 저기 근데, 사실 우리 회사가 일 순위라서 다니는 사람은 없지 않아요? 다른 데를 도저히 못 넘어가니 어영부영 오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골라서 뽑을만한 처지는 못 된다 이거지요."

때아닌 구원투수의 등장에 모든 지원자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었다면 나를 제외한 다른 지원자들의 얼굴엔 혐오랄까, 경멸이랄까, '이 회사 정말 싫다'라는 무언의 강렬한 깨달음 같은 것이 동시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건 그의 말을 대하는 다른 면접관들의 태도였다. 그렇게 깔끔하게 무시할 바에야 도대체 그를 왜 거기에 데려다 놓았을까. 그 자리에 있던 지원자 중 최종적으로 입사가 결정된 사람은 나뿐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를 제외한 지원자들이 모두 구직의사를 철회하지 않았나 싶다.

"아니 이름은 또 왜 그렇게 쓸데없이 청순해? 그 얼굴에 하늘이란 이름이 가당키나 해?"

옆자리에 앉은 홍대리는 그의 이름을 두고 자주 불만을 내비쳤다. 그녀가 총애하는 남자 아이돌의 활동명이 '온하늘'이었는데 그는 '우하늘'이었기 때문이다. 다방면으로 불쾌한 중년의 남자가 그녀의 최애와 같은 이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무조건 그녀의 푸념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그렇게 한바탕 쏟아붓고 나면 그녀의 기분은 눈에 띌 정도로 회복이 되어 있었고, 입사 오 년 차인 그녀의 기분이 나아진다는 것은 이 년 차인 나의 정시퇴근 확률 역시 높아진다는 신호였다.

그해 여름, 신규 밀키트 라인의 최종승인을 앞두고 부장급인 그는 거래처로 외근을 나갈 일이 많아졌다. 그를 따라다니며 자료를 챙기고 회의록을 작성할 직원이 필요했는데 모든 여직원이 노골적으로 그를 회피한 덕에 부서 내 유일하다시피 한 남자직원인 내가 그의 보필을 떠맡을 때가 많아졌다.

그는 각오한 대로 상대방의 불쾌지수를 높이는 데 범상치 않은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면접 이후로는 딱히 부딪힐 일이 없기도 했고, 어쨌거나 가장 곤란한 자리에서 간접적인 도움을 받은 적도 있는지라 개인적인 억하심정은 없었는데 장시간 밀착해서 다니다 보니 역시 소문대로 밉상이구나 싶었다. 그는 스몰토크 따위는 개나 줘버린 듯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도 불현듯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했다.

"어, 음, 용문씨는 사실 여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타입은 아니야, 그건 본인도 잘 알지? 멀끔하고 세련되게 잘 생겨서 이름이 용문이면 그건 매력적인 반전이지만, 그러니까 음, 용문씨처럼 용문이처럼 생겨서 용문인거면, 그건 그냥 용문인거지."

가뜩이나 덥고 습한 날씨에 느닷없이 투하되는 그의 팩트폭격을 듣고 있자면 이게 과연 현실인가 싶을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와, 진짜 저렇게까지 말한다고? 살면서 대단히 의로운 어른을 만난 적도 없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인 어른도 본 적이 없던 나는 어떤 면에선 그와 함께할 외출이 기대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는, 하는 일도 별 볼 일 없고, 하는 일 외의 시간도 지루한 무성영화 같기만 한 내 일상에 유일하게 컬러풀한 에피소드가 되어 준 것이다. 나는 속으로 부글부글하면서도 회사로 돌아가 동기인 김이현에게 짓밟힌 나의 자존감에 관한 이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싶어 안달이 났다.

김이현은 원래도 잘 웃어 주는 편에 속했지만, 특히나 우하늘 부장과의 일화에는 그녀가 정말로 재미있을 때만 짓는 특유의 표정을 가식 없이 보여주곤 했다. 큰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술을 꾹 다물고 '푸흐흐' 바람이 터져 나오는 소리와 함께 한껏 반달이 되는 그녀의 눈은 우부장으로부터 당하는 모욕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로 내 마음을 단숨에 녹여버렸다. '용문님은 말을 진짜 재미있게 해요.' 그러면서 내 어깨나 등을 가볍게 쳤는데, 우습게도 그 시간이 내가 회사에 다니며 월급날을 제외하고 보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유일한 때였다.

지루하고도 지난한 일들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회사에서 그녀에게만큼은 마주치면 그저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우하늘 부장이 나에게만 친히 말로 내려치는 강펀치는 그녀를 웃게 하는 나만의 치트키가 되었다.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성쯤이야 내던지는 일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우하늘 부장의 말투나 표정, 손짓까지도 제법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게 되었는데,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오며 가며 엿보는 사람들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렇게 김이현만을 위한 막간 쇼로 시작이 되었던 내 장기는 알음알음 유명세를 타기에 이르렀다.

"용문님이 우부장님 흉내를 그렇게 잘 낸다면서요? 우리도 좀 보여줘 봐."

사람들의 반응은 그가 일장연설을 시작하기 전 내뱉는 특유의 기합 소리와 말머리에 '어, 음' 하고 뜸을 들이는 화법, 그리고 내 이름 '용'자에 힘을 주어 말할 때 목소리가 살짝 뒤집히는 부분에서 가장 열광적이었다. 그를 지나치게 희화해 버린 건 아닐까 일말의 주저함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나에 대한 인신공격이 주 내용이니 크게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찌질함을 주제 삼아 우부장의 목소리를 빌려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무엇보다도 김이현을 웃게 하는) 일상 속 소소한 변주곡은 두어 달 지속되는가 싶더니 대규모 회식 자리를 맞이하여 어떤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그는 항상 회식 초반에는 본인 앞에 놓인 음식만을 천천히 음미했다. 메뉴가 싸구려 냉동 삼겹살이든, 고급 참치든지 간에 그는 일단 그날의 음식에 몰두했는데, 마치 그 시간에 주어진 사명은 오직 영양분을 섭취하는 데 있다는 듯한 진중한 표정이 압권이었다. 한창 술자리의 흥이 달아오르며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도 간간이 입술만 씰룩거릴 뿐 제 페이스대로 식사를 모두 마치기 전까진 절대로 그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았다. 당연히 건배에도 관심이 없었고, 알아서 제 잔을 채워 이따금 목을 축이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고 각자의 친분 정도에 따라 삼삼오오 모여 대화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제야 슬그머니 탐색에 나섰다. 한 손엔 제 몫의 술병을, 다른 한 손엔 잔을 가볍게 쥐고 스윽, 그가 나타나는 자리에는 별안간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될 정도로 강력한 존재감이었다.

그 날은 대형마트와의 거래성사를 축하하는 자리답게 웬만한 회식은 얼굴만 비추고 마는 김이사까지도 제법 늦게까지 남아있던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아무리 우부장이라도 설마하니 김이사가 사원급들을 모아놓고 한창 훈화 말씀에 열을 올리고 있는 불가침영역까지 넘보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김이사는 진즉부터 에이스인 김이현을 옆자리에 앉히고 연신 건배를 권하고 있었다. 나는 그 날따라 유독 얇은 치마를 입고 온 그녀의 허벅지가 신경 쓰였는데 그렇다고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그건 더 오해를 살만한 일이라 의식적으로 시선을 김이사의 미간으로 모으는 중이었다. 취한 간부는 누구보다도 대하기가 어려운 존재인 법. 눈치를 봐서 김이현과 자리를 바꿔 주고 환심을 좀 사볼까 싶었건만, 액션 없는 마음만 앞서나간 사이 김이사는 눈에 띄게 취기가 오르는 중이었다. 김이사의 행동이 아슬아슬 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김이현에게 업무상 애로사항은 없는지, 술잔은 왜 비우지 않는지 재차 질문하며 안 그래도 가까운 거리를 자꾸만 좁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제때 엉덩이를 들지 못한 스스로의 아둔함을 자책했다. 지금 끼어들었다간 십중팔구 김이사가 넌 뭐냐며 도끼눈을 뜰 텐데, 김이현을 구하고 김이사의 미움을 살만큼 우리가 각별한 사이인지, 아니 그것보다도 김이현이 지금 곤란한 상황이 맞기는 한 건지, 어쩌면 그녀는 영향력 있는 이사와의 내밀한 시간을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니 근데 김이현이 그런 캐릭터였나, 나 홀로 마음이 널을 뛰었다. 게다가 원래도 표정관리를 잘 하는 김이현이 시종일관 웃는 얼굴이어서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바로 우부장이었다. 꼭 봐야 할 용건이 있는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을 쑥 내밀어서 김이현과 김이사는 물론 그들을 예의주시하던 나까지도 움찔했다.

"음, 저기 김이현 사원, 고맙다는 말을 좀 하고 싶은데. 김용문 사원 말로는 김이현 사원이 이번 계약 건 백업을 그렇게 야무지게 해줬다고."

별안간 김이현을 사이에 두고 김이사와 우부장이 나란히 술잔을 받쳐 든 진풍경이 펼쳐졌다. '아 네', 김이현이 우물쭈물 건배하는 시늉을 하며 잔을 들자 채 비우지 못한 소주가 찰랑거렸다. 우부장은 '아니 음, 나는 그냥 수고했단 말 하려고', 하며 건배를 거부하는 듯 애매한 손길을 보이더니 다시 느릿느릿 일어섰다. 하지만 김이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우부장의 손에 들린 소주병을 가볍게 낚아채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지 마시고 부장님은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그 말에 우부장은 정지버튼이 눌린 사람처럼 우뚝 멈춰섰다. 그러더니 하암, 짧은 들숨을 내뱉었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 음, 나는 여직원한테는 술 안 받습니다. 괜한 오해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김이현씨도 술이나 따르자고 입사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내 술은 내가 알아서 마십니다."

그러고는 마치 짱짱하게 감긴 태엽이 풀린 목각인형처럼 뚜벅뚜벅 속도를 높여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어정쩡하게 소주병을 들고 선 김이현과 이제껏 김이현이 주는 술을 연거푸 들이켜던 김이사의 주변은 찬물을 끼얹은 듯 정적이 흘렀다. 김이사는 우부장이 쏟아 낸 말들을 미처 다 소화 시키지 못한 표정으로 잠시 옷매무시를 가다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예열이 끝난 솥처럼 화르르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이 우부장,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내가 그동안 아슬아슬하다 했어. 아니, 아무리 입사동기라지만 그래도 이사가 바로 옆에 있는데, 우부장님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다음 날 아침부터 한껏 들뜬 표정의 홍대리가 출근하는 나를 붙들어 세웠다. 컨디션 난조를 핑계로 회식에 불참하더니 언제 또 소식은 전해 들었는지 더 자세한 자초지종을 졸라댔다.

나는 김이현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내 시선은 쏙 빼놓고 철저히 그저 조금 가까이 앉아있던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달했는데, 우부장이 김이현의 술을 거절한 부분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그가 가진 특유의 억양과 제스처를 섞어 말하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의 절정에서 홍대리의 얼굴에는 묘하게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프다더니, 우부장의 기행이 그녀의 명약이라도 되는 듯했다.

"와, 오늘 거 역대급인데? 용문님 방금 진짜 우부장 같았어."

홍대리는 자꾸 친한 동료들을 불러모아 한 번만 더 보여달라며 나를 부추겼다. 전과는 다르게 부쩍 난처함을 느끼긴 했지만 모처럼 몰두할 화젯거리가 생긴 홍대리의 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눈치였다.

문제는 나에게도 있었다. 청중의 열기가 달아오를수록 자꾸만 나도 모르게 최선을 다해 모사하고 마는 것이었다. 우부장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 한 줌이 더해져 전과는 다르게 영 개운치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진 않았다. 얄팍하게 쌓아 올린 죄책감 따위는 우부장의 변함없는 꼰대 밉상 언사에 바스스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어, 음, 김용문씨 말이야, 혹시 3년 차에 이직 생각하고 있으면 그 맘 접는 게 나을 거야. 3년차가 금값이라는 말도 사람 나름이지 용문씨 같이 애매한 스펙은 힘들어. 김이현이, 그래 김이현이 정도면 충분히 점프할 수 있지. 용문씨는 사실 남자가 너무 없어서 뽑힌 거지 점수로 나래비 세웠음 어림도 없었어요. 이런 회사지만, 조금 더 진득하게 붙어 있다 보면 길이 좀 보이겠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구나, 그날도 나는 이를 악물고 암요, 제 주제에 무슨 이직을요,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는 내 대답이야 아무렴 어떻냐는 듯 자신의 충고에 만족한 얼굴로 이미 저만치 앞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김이현에게 오늘 있었던 일만큼은 말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밝은 이직 전망과 상대적으로 빈약한 내 장래를 '굳이' 상기시킬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우부장을 따라잡을 것도 없다 싶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앞서 걷던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쩔쩔매고 있는, 너무나도 낯선 그의 표정에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혹시 계약이 문제가 생겼나? 그렇다면 그 안에는 분명 내 실수도 있을 거라는데 까지 생각이 미치자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한달음에 그의 곁에 다가갔을 때, 내 우려와는 달리 그는 지극히 사적인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오빠가 깜빡했어…. 그래…. 미안해…. 우부장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없는 단어들의 파편들이 맥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곧이어 그의 갈 곳 잃은 눈동자가 내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키가 생각보다 작구나, 나는 고작 그런 생각을 했다.

서로의 시선이 부딪히고 꽤 시간이 흘러서야 겨우 딴청을 피울 정신을 차렸고, 그 역시 다급히 도보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럴 때 담배라도 태울 줄 알면 좀 덜 민망하려나, 나는 군대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은 때아닌 흡연 욕구를 느끼며 앱으로 택시를 호출했다. 그의 통화가 끝남과 동시에 기사가 배정되었다는 알림이 떠서 자연스럽게 침묵을 깰 수 있었다.

"택시 말이에요, 오늘은 일반호출로 불렀는데도 금방 잡혔어요. 정산 올릴 때 눈치 좀 덜 봐도 되겠는데요."

택시비 정산 같은 사소한 문제로 눈치를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그 역시 음, 하고 짧게 반응할 뿐이었다.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내내 말이 없던 그는 (물론 평소에도 다정하게 수다나 떠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회사에 도착하기 직전에 간단한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평소의 일장연설과는 다르게 내가 아닌 허공을 보며 날려버리 듯 한 말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사납게 내 머리를 휘저었다.

"어, 음, 저기, 조금 전에 그 통화는 흉내 내지 말아줄래요? 다른 건 다 따라 해도 상관없어, 얼마든지 재미 봐요. 조금 전 것만 잊어주면 좋겠는데."

'하암'. 그는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특유의 기합 넣는 소리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보통 때라면 그 소리 뒤에 오는 말들이 견딜 수 없었겠지만, 그때만큼은 그 소리 뒤에 이어지는 고요가 나를 더 괴롭게 했다.

그 날의 외근을 끝으로 밀키트 출시가 마무리되어 우부장과의 단출한 외출도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긴 시간 우부장이랑 붙어 다니느라 욕봤다며 앞다투어 나의 공을 치하해주었지만, 나로서는 상당히 께름칙한 마지막 장면으로 속이 후련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의 성대모사를 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어, 음, 저기 김이현씨는 그게 밥 한 공기 칼로리인 거는 알고 먹는 건가? 밥을 다 먹고 그걸 먹는다는 게 좀 그렇지 않나?' 김이현에게 아부성 바닐라 라떼를 건네며 짤막한 꽁트를 선보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전처럼 반응이 크지 않아 민망한 뒤끝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김이사의 호출이 있었다. 처음으로 대면한 자리에선 시장에서 밀키트 반응이 나쁘지 않다며 최전선에서 일을 진행한 장본인이니 혹시 더 보태고 싶은 의견이 있는지 물어왔다. 최전선에서 일을 진행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우부장이라는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자리에 우부장은 불려오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도 부담도 그저 내 몫이었다.

정해진 업무를 따라가기에도 급급했던 주제에 의견이랄게 있을 리 만무했던 나는 이 기회에 SNS 홍보를 더 적극적으로 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뻔하디뻔한 답을 내놓았다.

"음, 좋은 생각이네. 그래 이렇게 참신한 아이디어를 가진 젊은 피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줘야 회사에 미래가 있어요. 그래, 우부장이랑 일해보니 어떻던가? 그 사람이 뭐랄까, 노멀하진 않잖아? 같이 일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어땠어요? "

별 시답잖은 아이디어에 호평을 받은 것도 얼떨떨한 데다, 직속 상사에 대한 평가를, 그것도 임원에게서 대면으로 요구받는 상황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뇌가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는데 김이사가 별안간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내가 뭐 이간질을 하라는 게 아니고, 들리는 이야기들이 좀 있어서 확인해보려는 것뿐이니까. 계속 같이 다녀봤으니까 잘 알 거 아니에요. 거래처에서는 뭐 특별히 문제 같은 거 없었어요?"

문제라, 그 문제가 단순히 기능적인 것을 칭하진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우부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페왕' (페이퍼의 왕, 서류와 절차에 누구보다 진심이라는 뜻이다) 이라 불릴 정도로 정해진대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별명에 깃든 것은 경외보다는 팔 할이 조롱이었다. 맡은 일에는 오차가 없었지만, 그 일 처리라는 것이 조직을 매끄럽게 굴리기 위함이라기보단 '예외적인 상황'에 대한 어떤 강박적인 거부감 같은 것에 기인한 것이라 오히려 상대방을 겸연쩍게 만들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직원들이 궁금해해서 그러는데 다 같이 먹어보게 추가 샘플 좀 더 주실 수 없냐는 갑의 애교 섞인 요청에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해진 견본은 여기까지라서요, 제품 평가하기엔 그 정도면 된 것 같은데요', 로 말을 끊는 사람이었다. 오로지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전달할 때만 발휘되는 그 고도의 집중력은 상대방에게서 풍겨오는 당혹감, 어색해진 공기 따위를 파악하는 데에는 간데없이 사라져 숨이 막히는 건 늘 내 쪽이었다.

그런 문제를 말하는 걸까, 그런 거라면 지금 당장 생각나는 일화만 해도 한 보따리인데, 근데 또 고작 그런 문제가 '문젯거리'가 되는 걸까, 생각이 폭주했다. 하지만 이후에 김이사가 제기한 문제라는 게 너무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라 꼬리를 잇던 상념 덩어리들은 도화선을 잃은 폭탄처럼 머리 한구석을 차지한 채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우부장이…… 아, 나 이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여직원들 사진을 자꾸 찍는다는 말이 나와서 그래. 그거에 대해선 뭐 아는 거 없어요? 김용문 사원이 친한 여직원들이 많다던데. 외근 나가서도 뭐, 여자들 몰래 찍고 그런 일 없었어요? 괜찮아요. 오늘 나온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테니까."

사람이 좀 찌질하긴 해도 이렇게 끝도 없이 추잡하진 않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혼란함이 나를 덮쳐왔다. 김이사는 내 표정에서 어떤 신호를 읽었는지 조용히 누군가를 호출했다. 어느샌가 사내 분위기와 겉도는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들어와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있었다. 김이사는 '아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대답해요. 들리는 말로는 우하늘 부장이 김용문 사원의 외모나 학벌에 대해 공격적인 발언을 했다는데 맞나요?' 따위에 반박하기 힘든 질문들을 몇 개 던졌다.

"그게, 그런 말을 하시긴 했는데 공격적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했다는 말이죠?"

"네 뭐, 하시긴 했죠. 그렇긴 한데……."

김이사의 연이은 강속구에 좀처럼 맥을 못 추고 있을 때 회심의 질문이 던져졌다.

"몰래 여자들을 촬영한다거나 성추행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고요?"

김이사의 말투에서는 갈급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있어서만큼은 정확하게 힘을 주어 대답할 수 있었다.

"아니요,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김이사의 결정적인 문제 제기에 힘을 실어주지도, 그렇다고 우부장을 제대로 대변해주지도 못한 채 찜찜하게 그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젊은 인재 운운하며 나를 환대하던 김이사의 태도는 인터뷰가 마무리되자 눈에 띄게 성의가 없어졌지만 내 미련한 머리는 예기치 않게 쏟아진 질문세례와 관련된 기억을 뒤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홍대리는 카톡 창을 컴퓨터 화면에 버젓이 띄워놓고는 누군가와 이모티콘을 잔뜩 섞어 정신 산란한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빠른 속도로 타이핑 하는 그녀의 가벼운 손가락을 보니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느릿느릿 스마트폰의 액정을 터치하던 우부장의 뭉뚝한 검지가 연상되었다.

그리고는 퍼뜩 떠올랐다. 외근을 나간 날이면 주기적으로 시간이 뜬 배경화면을 캡처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던, 이해할 수도 없었고 딱히 이해하려는 마음도 없었던 그의 기이한 행동이 말이다.

김이사에게 강력히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 다름 아닌 김이현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회사 전체로 퍼졌고, 추잡할수록 달콤한 법인 모처럼의 사내 스캔들에 사람들은 애써 호기심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오직 단 한 사람, 우부장만이 외딴 섬처럼 자신의 일과를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따라주는 술도 한 잔 안 받는 양반이 사진에는 또 조예가 깊으셨나 보지', 소문의 진위를 파악도 하기 전에 홍대리는 우부장이 멀찌감치 지나가기만 해도 신경질적으로 다리 위에 무릎담요를 가져왔다.

"근데 증거가 나왔어요? 사진이라던가…."

"그게 남아있겠어? 다 지웠겠지. 어쩐지 심심하면 찰칵찰칵 거리더라니, 그게 설마 진짜로 다리를 찍는 건 줄은 상상도 못했지. 그렇게 대놓고."

그러니까 그렇게 대.놓.고 사진을 찍는 걸 누가 봤냐고, 정확히 피사체를 확인한 게 맞냐고, 나는 자칫 따져 물을 뻔했지만, 확신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녀의 눈을 보자 저절로 말이 꼴깍 넘어갔다.

일각에서는 그동안 우부장에게 언어 성희롱을 당한 여직원들이 알게 모르게 많다며, 드디어 터질 일이 터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누가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는 말해주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김용문씨도 이 기회에 인사팀에 신고해. 그동안 들을 소리 못 들을 소리 다 참아줬잖아."

누군가는 짠하다는 듯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우부장을 둘러싼 폭풍전야 같은 현재 상황에서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단박에 가늠할 수 있었다. 끈 떨어진 우부장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온갖 구박은 다 받고 클레임 처리까지 도맡아 해야 했던, 좋게 말해 성격이 동글동글한 거지 정곡을 찌르자면 살짝 '모자란' 캐릭터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열심히 우부장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내 치부를 드러냈을 때, 웃겨 죽겠다면서 깔깔거리던 그들의 마음속에선 '아이고 저 모지리, 좋댄다' 하고 있었던 거다. 적어도 같이 싸잡혀 한편으로 몰리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싶다가도 어쩔 수 없이 뒷맛이 씁쓸했다. 나를 대하는 김이현의 태도조차도 미묘하게 사무적으로 변해있었다.

그 전까지는 우부장의 은근한 고립이 모종의 자유를 향한 고집처럼 느껴졌다면, 모두가 수군거리는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소외감과 무지함이 그에게 덕지덕지 들러붙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생각이 한번 자리를 잡자 어쩌다 그와 마주쳐도 전처럼 자연스러운 대응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 보잘것없는 직장 내 동선과 그의 동선이 상당 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는 중이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커피는 탕비실, 점심 후 한두 시간 후 화장실로 이어지는 내 생체리듬을 그 역시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동선이 겹친다고는 해도 원체 동석을 꺼리는 성향이신지라 대화가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전 같았으면 자연스러웠을 안부 인사조차도 얼굴 근육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던 어느 날, 홍대리는 늘 그렇듯 지나가는 말로 '우리 점심 요 앞에 새로 생긴 파스타 집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라고 물었고, 나는 입사 이래 처음으로 '네 저도 파스타 먹고 싶어요'라고 대답을 했고, 홍대리는 예상치 못한 나와의 합석에 잠시 당황을 했고, 그렇게 쥐꼬리만 한 밀가루면 주제에 한 그릇에 만 칠천 원에 육박하는 로제 뭐시기 파스타를 홍대리와 김이현을 포함한 네 명의 여직원들 사이에서 꾸역꾸역 먹게 되고 만 것이었다.

메뉴를 고르고 각자의 컵에 물을 따르고 주문을 하는 동안에는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파스타를 먹고 싶다니 의외였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느냐부터 주말에는 주로 뭘 하는지, 더 나아가서는 여자친구가 있는지 (이 대목에서 나도 모르게 김이현 쪽으로 시선이 향했는데 너무나도 순수하게 나 몰라라 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남아있던 일말의 희망마저도 와르르 무너짐을 느꼈을 뿐이고) 하는 내 신변잡기에 대한 다정한 질문들이 오갔다.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답하고 싶었지만 실제로 나는 파스타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주말에는 그저 게임이나 할 뿐이고, 여자친구는 있을 리가 없으니 답변이 시원찮을 수밖에 없었다.

피차 어색한 시간을 뚫고 마침내 메뉴가 모두 나왔을 때, 나를 제외하고는 왜 모든 주문을 한 사람이 도맡아 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샐러드, 피자, 파스타 두 종류를 가운데 놓고 사이좋게 나눠 먹는 그녀들 앞에서 나는 홀로 내 앞에 놓인 그 꾸덕한 면 덩어리를 해치울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할당된 관심은 일찌감치 모두 소진된 듯 어느 순간부터 내 존재는 거의 조형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다양한 주제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홍대리 옆자리에 앉은 자의 숙명으로 한 번씩은 다 귀동냥으로 들어봤음 직한 얘기들이라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주제가 우부장으로 옮겨붙자 더는 시큰둥할 수가 없었다.

"오늘이지 우부장 감사팀에서 면담 있다는 날이?"

"아니 그런데 우리 회사에도 감사팀이 있었어요?"

"목격자까지 나온 마당에 그냥 넘어갈 순 없었겠지. 김이사가 감사팀 비슷하게 TF팀을 만들었대. 이 기회에 사내 이슈들 뿌리 뽑는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부장 대단하네, 없던 감사팀도 만들고. 그나저나 이현 씨는 괜찮아? 목격자가 본 사진이 이현 씨 뒷모습이라며? 와 진짜 기분 더러웠겠다."

김이현이 그렇죠 뭐, 짧은 대답을 끝으로 빙그레 웃었다. 김이현이 짓는 웃음의 종류를 -자랑은 아니지만- 줄줄이 꿰고 있는 나에게도 그 미소는 생소했다. 그리고 그 미소만큼이나 낯설었던 것은 내 마음속에 일렁이던 멀미 같은 불편한 감정이었다.

오합지졸로 구성된 TF팀은 사건이 일단락되자마자 와해 되었고, 우부장의 녹취록은 허술한 보안으로 암암리에 이 부서에서 저 부서로 돌고 돌았다. 그 안에는 물증 없이 빈약한 목격담이 전부인 '몰카' 사건에 대한 짤막한 추궁과 그간 우부장이 보인 투박한 언사에 대한 꾸지람이 이어졌는데, 감사팀장을 맡은 김이사의 수족 중 한 명이 작정하고 우부장에게 불리한 증언들을 모아온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김용문 사원에 대한 습관적인 인신공격'도 한 문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증언이란 것들이 막상 서면으로 옮겨 놓으니 어떤 결정적인 선을 넘는 것이 없었을뿐더러, 그동안 굳이 드러내지 않았던 불행이 면면한 우부장의 인생사만 적나라하게 까발려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고등학교 때 겪은 조실부모, 그 이후로 심각한 불안증을 앓게 된 여동생, 그런 여동생에게 정해진 시간마다 시계 화면을 캡처해 생사를 알려왔다는 진상은 여론 일부분을 동정표로 돌리기에도 충분했다. 조직에 남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절규에 가까운 변을 내어놓는 우부장의 태도에 녹취록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감사팀장의 낭패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감사가 끝나고 얼마 있지 않아 우부장은 이천에 소재한 식품공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마지막 본사 출근을 앞두고는 그답지 않게 연차를 썼고, 다음 날 출근해 보니 그의 자리는 주인의 흔적 없이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이별인가 싶었는데 공장으로 근무지를 옮긴 지 한 달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김용문 사원, 일이 많이 바쁘지 않으면 다음 주에 한 사흘 정도 여기 와서 내 일을 좀 도와줬으면 합니다. 본사에는 내가 직접 요청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하나.

-사흘은 4일이 아니고 3일을 뜻합니다. 저번처럼 헷갈릴까 봐 덧붙입니다.-

그렇게 공장 근처 숙소에 짐을 풀고 그와의 협업에 들어갔다. 그는 명색이 '페왕' 답게 시스템 없이 마구잡이로 관리되던 온갖 실물 서류들을 분류해 데이터화 시키는 작업에 돌입한듯했다. 본사에서 떨어진 여러모로 불쾌한 사내가 벌이는 추가업무를 현장직에서 반길 리가 없었다. 우부장은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했는지 본사에서 잠시 빼 온들 큰 타격이 없을 나를 고른 것이다.

그의 부름을 받고 꼬박 이틀을 먼지 쌓인 서류 뭉텅이들과 함께 쿰쿰한 냄새가 나는 사무실 안에서 노트북 타이핑 소리만으로 지새우고 있자니 조금 억울해졌다. 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저기 부장님, 저 여기까지 왔는데 맛있는 것 좀 사주세요. 술도 좋구요."

그의 대답은 의외로 빠르고 명쾌하게 돌아왔다.

"그래야죠. 당연한 얘깁니다."

퇴근 후 말없이 나를 차에 태운 그는 근방에서 유명한 오리 주물럭집 앞에 잠시 정차하더니 미리 주문해 놓은 듯한 음식을 한 아름 포장해서 들고 왔다. '여기서는 술을 마시면 택시도 없고 대리도 부르기 어려우니 내 방에 가서 마십시다.' 나는 저녁 한 끼 얻어먹자고 들었다가 그의 사적인 공간까지 진출하게 된 형국에 목이 바짝 탔다. 그는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어차피 내일이면 이곳에서의 일정이 끝나니 숙소에서 짐을 챙겨 오겠냐고 물었다.

"네? 그럼 부장님네서 자고 가라구요?"

아뿔싸 지나치게 크게 놀라는 목소리였나, 싶어 그를 쳐다보는데 나보다 그가 더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아……. 이래서 내가 이 회사의 빌런이라는 말이 나왔나 봅니다. 악당이라니, 좀 너무하다 싶었는데 김용문 사원 입장에서는 내가 악당이 맞겠네요."

차 안의 공기는 분명히 바뀌어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물어도 좋을 때라고 나는 생각했다.

"왜 저한테 자꾸 그런 말들을 하셨어요? 솔직히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었거든요."

그는 잠시 내 질문을 곱씹으며 운전에 집중했다. 하암, 곧이어 익숙한 낮은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어, 음, 친구가 자꾸 멋있는 옷인 줄 알고 너무 우스꽝스러운 짝퉁을 입고 다닌다고 칩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기분 나쁠까 봐 말을 안 해줘요. 뒤에서 조롱을 당하든 말든 하기에 좋은 소리는 아니니까. 그런데 나는 말을 해주는 사람입니다. 창피는 나한테만 당하면 되지 그 이후가 좋아지잖아요."

그 뜻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입고 있는 옷을 살폈다.

우부장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빌런이 등장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우부장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사람이었는데 말이 지나치게 많았고, 지나치게 눈치를 보고, 지나치게 꼰대가 되기를 꺼린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요즘은 라떼라떼 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내가 이래 봬도 낄끼빠빠를 잘해요."

그가 어디서 주워들은 때 지난 줄임말 같은 걸 입에 올릴 때마다 모두가 극도로 민망해 했지만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도 그런 분위기는 또 용케 감지를 못하는 것이 신기했다. 새로운 사냥감을 문 홍대리는 누가 보면 그와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매일같이 그의 웃기지도 않은 말들을 나에게 속닥거리며 전해주었다.

"너무 웃기지 않아? 용문씨는 아직 김팀장님이랑 말 안 해봤어?"

"네, 아직이요."

"어디 요즘 애들 쓰는 은어 사전 같은 거 넣어뒀나 봐. 매일매일이 새로워. 배운 거 써먹고 싶어서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니까?"

"아, 그래요?"

그녀는 부쩍 심드렁해진 내 태도에 잠시 눈알을 굴리며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한결 서늘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용문 씨, 요즘 나한테 뭐 서운한 거 있어요? 사람이 말을 하는데 쳐다를 안보지?"

직장 선배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식은땀으로 등어리를 잔뜩 적실 줄 알았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머릿속이 시원하게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온화하게 웃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하암, 기합 한 번.

"음, 그럴리가요 선배, 그냥 좀 시끄럽달까요. 일에 집중하고 싶어서요."

잠시 후 점심시간이면 그녀는 친애하는 동료들과 함께 '김용문이 드디어 미쳤나 봐'를 외치며 파스타인지 떡볶이인지를 먹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의 구내식당 특식은 뭘까,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당선소감]
오늘은 성공한 덕후… 생업속 노력 인정받은것 같아

소설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서 열심히 읽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쓰고 또 쓰다 보면 도대체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싶은 순간들을 가끔(사실은 자주) 맞닥뜨린다. 그래도 결국엔 좋아하는 마음으로 귀결된다. 이 지경쯤 되니 이것도 일종의 광기 어린 '덕질'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나는 성공한 덕후다.

나에게는 덕질을 공유하는 소중한 글쓰기 친구들이 있다. 내가 쓴 소설을 진지하게 읽어주는 최고의 독자이자, 신나게 뼈를 때려주는 독한 멘토이자, 장차 라이벌이 될 동료 덕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담야, 소란, 안틱, 장수. 실명도 아닌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를지언정 인생의 엑기스 만큼은 공유하는 참으로 신기한 인연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큰 사고는 안 쳐도 당최 속을 알 수 없어 키우기 쉬운 딸은 아니었을 텐데, 적당히 내려놓고 갈 길 가게 지켜봐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다. 자매님을 비롯해 자기 일처럼 뿌듯하게 여겨준 친구들도 고맙다. 내 인생을 더 벅차고 두렵게 만들어준 나의 소우주, 나의 딸 나은, 소설이 뭔지 알만한 나이가 되면 엄마가 왜 이따금 예민했었는지 부디 이해해주길.

그리고 나만의 작은 세상을 더 단단히 움켜쥘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또 사랑해준, 이제는 또 다른 나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나의 남편 원동건, (비록 가끔은 죽도록 밉지만) 이 기쁨의 절반을 똑 떼어 그에게 주고 싶다.

생업과 생활 틈틈이 억지로 소설을 욱여넣어 가며 영위해온 노력이 조금은 인정받은 것 같아 행복하다. 당선 전화를 받고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부끄럽게도. 거창한 소감을 쓰기가 민망할 만큼 앞으로 더 큰 좌절과 막막함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써야지 어쩌겠는가. 나는 소설이 좋다.

도대체가 프로필로 쓸만한 사진이 없어서 동네 스튜디오에 가서 난생처음 세미프로필이라는 걸 찍었다. 사진 한 장에 3만5천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이상 천년만년 써먹을 심산이다. 부디 써먹을 기회가 많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심사평]
'관계의 어려움' 진지하게 풀어내… 이야기 형식도 참신

구효서 소설가·최수철 소설가"

올해 응모작들은 비교적 높은 수준을 보였다. 그 중, '하찮은 진심', '점프, 지송', '나비의 무게', '슬러지', '사운드 아일랜드'가 본심에 올랐고, '하찮은 진심', '점프, 지송'이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우선, '점프, 지송'은 그룹사운드가 공연을 벌이는, 현장감 넘치는 방송 녹화 무대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인물들의 캐릭터를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묘사의 힘과 반어법을 통해 유머 감각을 발휘하는 서술의 능력 등등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흥미롭게도 작품 속에서 일인칭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방탕함'이라는 다소 가벼운 주제를 담고 있었지만 일관성이 있었고 그래서 깊이가 생겼다." 우리는 그 말에 대략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다만 '깊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편, '하찮은 진심'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어려움'이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풀어나가고 있다. 한 중소기업의 우하늘 부장이라는 중년 남자는 꼭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굳이 뜸을 들이면서까지 하고, 상대방의 불쾌지수를 높이는 데 범상치 않은 재주가 있고,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고, 자신의 원칙 앞에서 비타협적이고, 그런가 하면 불필요하게 날을 세워서 엉뚱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소설은 그 사내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화들을 들려주면서 그의 말과 행동이 가지는 역설의 의미를 펼쳐나간다. 그의 곁에서 부하 직원이자 화자인 김용문은 자신을 한낱 하찮은 톱니바퀴라고 여기며 우 부장을 놀리고 흉내내는 것을 일삼는다.

그러나 차츰 그는 우 부장을 닮아가면서 사회라는 조직 안에서 자신의 진정한 자리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여기에 이 글의 주제 의식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에서는 회사 감사팀 녹취록에서 우 부장과 화자의 진술을 발췌하여 각 단락 앞에 배치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야기 형식에 대한 이러한 참신한 시도 또한 이 신진 작가의 역량을 느끼게 하는 점이다. 앞으로도 이번 소설에서 보여준 면밀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인간 삶의 소소하면서도 소중한 진실을 우리에게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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