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 당선작품 글창고

경향신문 2026년 시

졸업반

김남주

우리는 술에 취해 무궁화
무궁화 흙바닥에 선을 죽 그어놓고

꽃이 피었습니다

내가 술래,
무궁화는커녕 나무 하나 없는 운동장에서

너희들은 내게 다가온다 한 발 두 발
시치미를 떼며

나는 노래를 부른다 전주도 후렴도 없는 첫 소절이 마지막 소절인

그러니까 반복해서 불러야 해 노래가 끝나지 않도록
놀이가 끝나지 않도록 한 소절이 노래의 전부가 되지 않도록 노래보다는 구호에 가까운 한 문장을

우리는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집 안에는 우리가 없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뒤의 인기척
무엇인가 오고 있다
손가락과 손가락이 끊어지는 서늘함

우리들은 달린다
우리가 그어놓은 출발선을 향해

저기서부터 출발이야,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울지 마 울지 마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모두 혼내주자
그게 설령 우리를 낳아준 사람이라도

이 도시는 깨끗해서 외롭고
무엇인가 오고 있어

쉴 틈 없이 쏟아지는 재난 경보 문자들
일기예보처럼 읽어내는 재난 말고

고개를 돌릴 때마다 선명해지는
나를 웃기기 위한 해괴한 표정과 자세 말고

뒷덜미에 울리는 숨소리
과장된 웃음소리

오고 있어,
무궁하고 무진하고 꽃 같은 것들이

[당선소감]
시를 사랑해 시인의 이름을 주신 부모님께 드립니다

어떤 날엔 훌쩍 떠나고 싶었고, 또 어떤 날엔 풀썩 주저앉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건 언제나 마음일 뿐이었고, 저는 오늘도 착실히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할 일이 있거든요.

시는 그렇게 제 일상을 지켜주었습니다. 지도처럼, 오늘 할 일과 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은 날, 믿을 수 없는 기쁨과 스스로가 미덥지 못한 걱정이 뒤섞여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짐하고 있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만큼은 걱정을 도려내고, 기쁨만을 윤이 나게 닦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려고요.

오늘의 기쁨은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장옥관 교수님, 김민정 선생님을 비롯한 계명대, 명지대 교수님들이 메마른 화분에 매일 물을 주듯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글치레 아이들,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들과 문우들, 그리고 사랑하는 나의 진돗개가 끝까지 제 곁에 있었습니다.

제게 처음 시를 알려주신 건 부모님이었어요. 김남주 시인을 사랑해서 남주라고 제 이름을 지었고, 어린 제 손을 잡고 도서관으로 향했습니다. 어떠한 가난에도 악착같이 일을 하며, 딸을 대학원까지 보냈습니다.

저는 한 번도 혼자서 글을 쓴 적이 없어요.

저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해주시고 용기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절친한 나의 몸에게는 사랑과 증오를 드리고요.

삶의 노래가 되어준 문학에게,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낡은 동경을 바칩니다.

못난 나의 언어를 드려요.

받아주신다면 저는 기쁠 거예요.

▲김남주

△ 1995년 출생

△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심사평]
리듬·생동감, 읽을수록 또 읽고 싶게 만드는 힘

한 명의 시인을 처음 만나는 일은 그간 함께한 시인들을 다시금 한 번씩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문학과 문학적인 것. 시와 시적인 것. 미학과 미학적인 것. 우리가 서로 딛어온 영토를 재확인하고 흐릿해진 경계선을 다시 그어봅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우리를 우리에 가두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그러므로 모범과 안주보다는 비행과 탈주에 더 많은 마음을 들입니다. 높고 튼튼한 담장보다는 활짝 열리는 문을 기대합니다. 202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에 임한 4인은 이와 같은 태도로 6000편에 이르는 작품을 살폈습니다.

정독과 토론 끝에 심사위원은 총 6인의 작품을 두고 숙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년, 장발장’ 외 4편은 내면과 현실의 간극을 아름다운 낙차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다만 필요한 진술과 필요하지도 불필요하지도 않은 진술, 그리고 불필요한 진술에 대한 분별이 조금 더 엄격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올해는 아무것도 못했습니다’ 외 3편은 어떤 삶의 풍경을 선연하게 옮기는 일만으로도 좋은 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의 결말이 매번 지나치게 닫힌 구조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앓기잃기’ 외 4편은 활달한 상상력과 이를 받쳐내고 감당해내는 문장이 돋보였습니다. 하지만 독자가 본인의 의도를 다 알아차리지 못할까 싶은 강박 탓인지 큰 의미 없는 중복과 중첩이 눈에 띄었습니다. ‘간절기’ 외 4편은 많은 장점이 잠재된, 하지만 분명한 단점이 드러난 작품이었습니다. 본인이 지닌 개성이 독특한 만큼 이것이 일차적으로 전달되는 언어는 더 정확해야 한다는 고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심사위원 4인은 ‘교환’ 외 4편과 ‘졸업반’ 외 4편을 끝까지 두고 어느 것 하나 선뜻 쥐어 들지 못했습니다.

먼저 ‘교환’ 외 4편은 사회 현실에 대해 넌지시 던지는 묵직한 메시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탄탄한 사유를 쌓아가며 본인만의 세계를 구축해내는 과정도 미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다만 시상을 더 펼쳐내야 하는 중요한 지점마다 최근의 시 독자에게 익숙하게 다가갈 낱말을 활용한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세워진 언어에 기대지 말고 본인만의 언어를 세운다면 더 좋은 시인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졸업반’ 외 4편을 202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정합니다.

투고한 5편의 작품 모두 리듬감과 생동감 덕에 읽으면 읽을수록 또 읽고 싶게 만든다는 의견이 있었고, 엄숙함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시적 태도가 돋보인다는 의견이 있었고,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시적 긴장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과감한 진술이 인상적이라는 의견이 있었고, 시의 묘사에 관해 더 깊은 고민을 해보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부디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의 눈과 함께하시기를. 그리하여 더 멀리 나아가시기를 기원합니다. 안타깝게 낙선된 분들에게도 아쉬운 마음과 함께 같은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심사위원 박준·이경수·진은영·황인숙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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